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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꽤 오래 알고 지낸(거의 15년 이상된 것 같다) 동네 형을 오랜만에 만났다. 벌써 큰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하고 있는 자영업이 그럭저럭 자리를 잡고 있지만, 그런 만큼 더욱 지금 쉴 수는 없는 일이라고. 내가 학교를 옮긴 것도, 1월에 파리에 다녀온 것도 모르는 걸 보아 우리가 상당히 오랜 기간 서로 연락을 안한 모양. 최근 6개월의 근황을 짧게 알려달라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 번 생각해보았는데.. 했던 일, 가본 곳, 만난 사람 같은 목록의 나열이 아니고선 간단히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5월엔 서울재즈페스티벌과 시규어로스 내한공연에 다녀왔다. 서울재즈페스티벌엔 이튿날인 토요일 오후에 갔는데, 어두워지기도 전에 비가 내리기 시작해 데미안 라이스 공연 때에는 엄청난 비를 맞으며 공연을 관람해야 했다. 그런데 그건 그런대로 또 즐거웠던, 다시 없을 경험. 시규어로스 공연 역시 뭐라 짧게 말하기 힘든 경험이었다. ‘내가 이런 공연을 다시 볼 수 있을까’라는 느낌의 압도적인 퍼포먼스. 그런 공연은 이전에도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아마 없을 것 같다. 한동안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어 허우적댔던 기억. 아이슬란드에 꼭 가고 싶다는 생각.

또 대학동기 레이트 강의 결혼식이 있었다. 꽤 오래 만난 친구여서 그런지,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사실. 잘 키워놓은(…) 동생 놈 장가보내는 기분이랄까. 내가 사회를 봤는데, 그럭저럭 성공적인 데뷔무대였다… 고 자평.

1학기는 별 큰 일 없이 끝났고, 이번 여름방학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일본여행을 제외하면 다른 일은 있을 틈이 없을 정도로 짧았다. PIFAN에서 영화 15편을 관람했고, 도쿄와 요코하마를 7박 8일 동안 여행했는데, 특히 이번 일본여행은 정말로 즐거웠다. 날이 덥긴 했지만, 서울보단 괜찮았고(훨씬 덜 습하다는 느낌), 맛있는 음식과 커피를 잔뜩 먹고 마시고, 좋은 전시를 실컷 볼 수 있어 좋았다. 일본이 별로 매력이 없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와는 도쿄와 요코하마가 정서적으로 무척 맞는다는 느낌. 기회가 된다면 몇 년 체류해보고 싶다.

6월에 EBS 교재검토위원에 지원했고, 이번에 출간된, 검토했던 교재에 이름이 실렸다. 궁금하신 분들은 EBS FINAL 7030 영어영역 A형을 참고하시고요… 계속 나에게 검토위촉이 들어올지는 잘 모르겠다.

페이스북 계정 비활성화. 완전 탈퇴는 아니지만, 별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딱히 소통이 되는 것 같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데다, 지나치게 개인정보를 많이 요구하며, 웹에서 볼 수 있는 온갖 필요도 없으며 잘못된 정보가 올라온다. 그런데에 질려버렸음. 올렸던 사진과 글들을 백업하고 싶은데… 귀찮아서 미루고 있는 중.

아래는 지난 트윗 몇 개.

*

누군가 꿈을 해석하면 그 힘을 잃게 된다고 했다는데, 어떤 관계에서는 그 관계를 정의하려는 시도가 관계가 가지는 힘을 소멸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하는 것 같다.

어젯밤 파코 로카의 ‘주름’을 읽었다. 최근 읽은 어떤 책보다 더 무겁게 다가왔음. 읽고나서 어떤 곡이 떠올랐는데 아마도 미카엘 하네케의 아무르amour 때문이 아닐까 함.

삼십년을 넘게 가져온 편견 같은 건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같다. 노력해도 바뀌기가 힘든데, 본인이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더 할 말도 없음. 판단의 기준이 ‘논리’가 아니라 ‘자신의 기분에 따라 재해석된 경험’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십대 중반까지의 경험과 직관으로 세계관과 가치관을 형성하며 그것을 고수하면서 살아간다는 느낌. 본인의 (불완전한) 잣대에 맞지 않으면 그것을 잘못된 것이라 여긴다. ‘~라면 으레 ~해야한다’라는 당위성을 시도때도 없이 부여함.

확실히 한국 사람들이 감사나 사과를 표현하는 연습이 덜 되었다고 생각(나도 포함). 빈 말이라도 자꾸 고맙다 미안하다 표현하는 게 어떤 관계에도 좋은 것 같은데.. 부모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니 자녀들도 똑같이 배운다. 학교교육은 한계가 있음

나는 어떤 섬 위에 있다. 넓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지낼만한 섬이다. 섬에는 육지, 또 다른 섬들과 연결된 다리들이 있어 언제든 원할 때면 오갈 수 있다. 나는 그 다리 중 하나에 불을 지른다. 다리가 불타 무너지고, 나는 또 다른 다리에 불을 놓는다.

bullshi* tolerance가 갈수록 낮아지고 있는데, 생각해보면 나의 심정은 다음과 같은 듯 : ‘나에게 남은 시간은 별로 없으며, 그 동안은 좋은 것만 보기에도 부족하므로 ㄱㅅㄹ를 일일히 보고 들을 시간이 없다’

왜 또 헛소리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확실한 사실을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게 아닐까 함.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왜 헛소리를 일일히 참고 있어야 하나, 뭐 이런 마음가짐인 것. 덕분에 인간관계의 범위는 착실하게 좁아지고 있다

나이와 관계없이 철없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건 몹시 지치는 일. 본인이 실제로는 ‘개념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에 더욱 그러함. 그냥 자기가 바보라고 인정하고 들어가는 사람들과의 대화가 훨씬 편하다. 개ㄷㄹ이라도 편히 주고받을 수 있으니

park hyatt tokyo의 bar new york은 정말 ‘the bar’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커버차지가 만만치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쿄에 다시 오면 또 가게될 것 같다. 도쿄 가시는 분들께 추천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의 돌벤치 위에 가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어서 깜짝 놀랐다. 간밤에 술 한잔 하신 아저씨가 ‘아 뭐야 왜 이리 더워’ 하면서 뚜껑을 벗어두는 장면을 상상해 봄

친구가 어제 연봉에 대해 했던 말 : 서울에서 한 달을 살아가는데에는 200만원 정도면 충분하며 그 이상은 ‘필요’해서 받는 것이 아님. 자신이 회사에서 어느 정도의 인정을 받고 있는지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또래의 ‘남자’ 친구들을 만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느낌. 절반 정도는 결혼을 했고 – 결혼 안한 친구들도 일을 하거나 연애를 하거나 둘을 동시에 하느라 바쁘다. 직장엔 남자직원이 거의 없고. 같이 캐치볼 할 동성 친구들이 갈 수록 줄어듬 :(

30대가 되고 나서 여러가지 일이 있었는데, 그런 여러가지 일을 통해 나도 아래와 같은 결론을 얻었다. 지금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지금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서, 지금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 그것이면 족하고 충분함.

좋은 사람들 만나고 좋은 영화와 공연 보고 좋은 음악 듣고 좋은 책 읽고 좋은 곳 놀러가기에도 빠듯한 인생. 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아직은 죽고 싶지 않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다음 주에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으며 떠나고 싶음

성공한 일부 386(이제는 30대가 아니겠지만)이 가지는 특유의 시선과 허세와 자아도취는 자신을 우주제일이라고 여기는 중학생을 보는 것과 비슷한 의미에서 불편하다. 그런데 이런 데에 끌리는 분들도 있는 것 같음. 재밌는 세상

세대론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들은 한국근현대사회에서 아마 가장 복받은, 마지막 세대가 아닌가 싶다. 그 이후의 30대가 가장 불행한 세대의 스타트를 끊고 있고, 20대가 더욱 우울한 전망으로 그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넘어서고 있다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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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래왔던 것처럼)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는 요즘.
‘사회적/경제적 조건을 기준으로 동반자를 고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다소 진부한 질문에서부터, 그렇다면 개인적/성격적/문화취향적 측면을 보고 사람에게 끌리는 것은 과연 그보다 더 나은 일인가라는 생각까지.

대강 서른이 넘어가면서,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어떤 시점에서 분명 한 번쯤은 가졌을 ‘좋아한다는 것 외에 다른 부가조건이 필요하지 않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다시 가지기 힘들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도 한 몫)

어딘가에 썼던 것처럼 사람들은 대략 20대 중반까지 본인이 보고 듣고 접한 것들을 토대로 일련의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그 중에 사랑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도 무척 재미있는 것 같다. ‘사랑love’이란 단어가 쓰이는 context는 셀 수 없을만큼 많고, 그것을 이성 혹은 동성간의 에로스적 사랑이라는 의미로 한정한다해도 그 사용예에는 무척이나 많은 용법이 존재하고, 그에 따라 수많은 오해와 오독과 오역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말이나 ‘사귀고 있다’는 관계에 어떠한 종류의 의무감을 부여한다. ‘사랑한다면, 남자친구/여자친구라면 당연히 ~해야한다’는 것이 그것인데, 실제로 이것이 큰 맥락에서는 두 당사자 사이에서 굳이 일일히 합의를 하지 않아도 될만큼 명백하지만, 자세한 맥락으로 들어가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무척 재미있다. 그리고 이 서로간의 오해는 또 수많은 비극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ex) 사랑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등의 비난과 질책. 조금 더 자세히는 ‘날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길거리에서 다른 여자를 쳐다볼 수 있어?’ 류의 관점)

나는 ‘영원한 사랑’이나 ‘순수한 사랑’이 없다는 등의 거창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솔직히 그런 건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관계에 있어 서로에 대한 이해, 또 그 관계에 대한 이해가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서로 어떠한 관계를 원하는지, 이 관계의 미래는 어떤 것이길 바라는지, 상대방에게 어떤 모습을 기대하며, 또 기대하지 않는지에 대해 충분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라면, 나중에 상대방과, 또 그 관계 자체에 대한 몰이해에서 오는 파국에 대해서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런 것에 대해 전혀 이해가 없는 채, 그저 순순하게 감정적으로만 서로에게 접근하며 사랑으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낭만주의자들은 굳이 아까운 시간을 들여 이 글을 읽고 있을 필요는 없으리라. (no sarcasm inclu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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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것은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쓰는 글이기도 하다. 이성을 ‘적극적으로 좋아한다’라는 감정을 가져본 적이 무척이나 오래된 것 같다. ‘저 사람이 괜찮다’거나 ‘만나보고 싶다’, ‘성적 매력이 있다’거나 ‘자고 싶다’거나 등의 감정은 있었지만(-_-), ‘저 사람에게만 집중하고 싶다’는 감정은 마지막 관계가 끝나는 동시에 사라졌다.

왜인지는 나로서도 이해하기가 힘들다. 5년간 여러 번의 연애를 하면서 사랑이라고 부를만한 감정자체가 소진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내가 지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그 이후의 많지 않았던 몇 번의 만남은 ‘연애’라고 불리우는 관계를 위한 탐색전이라기보다는, 그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자리였던 것 같다(적어도 내 쪽에서는 그랬다). 아 이런 일을 하시는 분들도 있구나, 이런 고민을 하며 사시는구나, 이런 것들을 좋아하시는 분이구나, 정도. 아니면 때로는 그냥 서로가 외로워서 만나는 자리였던가. 오해를 덜기 위해 굳이 적자면, 대부분 좋은 분들이었다. ‘연애’라는 관점에서 보면 다들 나에게 과분할 정도로. 나보다는 훨씬 좋은 사람을 만날 자격이 있는. 이제와 굳이 정의를 내리자면, 내가 원했던 것은 ‘친구’나 ‘지인’, ‘아는 오빠’로 불리우는 관계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앞으로는 어떻게 지내게될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그냥 내가 좋을대로 지내고 싶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될지, 되지 않을지는 지금의 내가 예측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까 함.

*

혼자 지내는 시간이 더 늘어나면서, 또 어떤 종류의 할 것과 하지 않을 것들에 대한 리스트를 만들어가며, 안그래도 좁던 인간관계는 여름볕이 잘드는 곳의 얕은 웅덩이가 착실히 말라가는 것처럼, 확실히 좁아지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내가 분명 어느 정도의 외로움을 느끼고 있으며, (말이 통하는) 친구가 많아지길 원하고 있으면서도 상대방에게 비교적 높은 수준의 지적 혹은 문화적, 도덕적 수준을 바란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를 충족할 만큼 지적이고 취향이 고상하며 여유로운 사람들은 별로 없다 – 나 자신이 그렇지 않으므로.
(이는 위에 쓴 사회적/경제적 성취와 성격적/문화적 취향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 과연 서로 얼마나 다른가에 대한 또다른 질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삼성제품을 쓰지 않는다던가, CJ 계열사를 이용하지 않는다던가, 육식을 줄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던가,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해받기는 힘들다. 그런데 처음 만나는 경우이거나, 아니면 직업적 측면의 동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별로 공감을 사기도 힘들고, 이해를 얻기는 더욱 힘들다. 일단 그들은 내가 그런 것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에 거의 관심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생각해볼 문제는 내가 그런, 어떤 것을 할 / 혹은 하지 않을 선택을 하다는 것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그에 반하는 선택을 하는 다른 이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관점이다. 예를 들면 육식을 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어떤 종류의 채식주의자들은 대부분의 비채식주의자들에게 비웃음을 살 뿐이다. 엊그제 갤럭시 S4를 새로 샀다는 동료 앞에서 굳이 내가 삼성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물론 다른 상황에서, 때로는 그 입장을 표명할 필요가 있다고도 생각한다)

이야기가 조금 다른 쪽으로 흐른 것 같은데, 간단히 말해서는 까칠해지고 있는 것 같다. 자신만의 꽉막힌 잣대로 세상사와 사람들을 판단하며 비난하는 사람들을 증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 자신이 그러한 사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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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정리하자면, ‘옳고 그름’보다는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물론 세상만사가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어떤 것에는 분명히 ‘그르다’는 딱지를 붙여야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가지고 ‘다르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그르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 사회가, 또 지금의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다름’이라고 간주되는 범위가 지나치게 좁으며, 대부분이 ‘옳거나 그른’ 잣대로 판단되고 있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무척이나 유감이다.

나는 무척 예측가능하고, 뻔하고 천박한 인간이지만, 주류 혹은 다수라고 불리우는 지점과는 조금 비껴나가있기도 하기 때문에, 나 자신의 ‘다름’을 인정받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당연히 나도 사람들의 ‘다름’을 인정해야한다고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지만 그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또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런 나의 말과 행동 자체가 ‘그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비극.

글이 꽤 길어진 것 같지만, 굳이 마무리를 하자면 다음과 같다 : 어떤 면에서는 내가 남들과 같지 않다는 점을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굳이 나의 어떤 선택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언제나 실패하고 마는, 나의 육식을 줄이려는 노력을 비웃지 않는 사람들, 가끔은 어두운 방에 틀어박혀 시규어로스 같은 걸 들을 시간도 필요하다는 걸 알아주는 사람들.

그러니까 오늘도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커피를 마시고 혼자 집에 돌아가 혼자 잠드는 아저씨의 넋두리였습니다. 다음 포스팅은 언제가 될까요.

Author: kikupekr

just an ajeossi next do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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