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에 해당되는 글 1건


About The Search in Posts




그리스인 조르바



01
"두목, 나를 용서해 주셔야겠소. 아무래도 나는 우리 알렉시스 할아버지와 비슷하단 말이오(하나님께서 그의 유택을 지켜 주시기를)! 할아버지는 백 살 되던 해에도 문 앞에 앉아 우물로 물 길러 가는 처녀아이들에게 추파를 던지고는 했지요. 그러나 시력이 좋지 않아 똑똑히 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처녀아이들을 가까이 오라고 불렀지요. <어디보자, 네가 누구더라?> <마스트란도니 집 딸 크제니오예요.> <가까이 오너라. 어디 좀 만져 보자. 오래두. 겁낼 것 없느니라!> 처녀아이는 엄숙한 얼굴을 하고 앞으로 다가갑니다. 그러면 우리 할아버지는 손을 들어 천천히, 그리고 아주 육감적으로 얼굴을 쓰다듬지요. 그럴라치면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린답니다. <할아버지, 왜 우세요?> 내가 언제 할아버지께 여쭈어 봤지요. <얘야, 내가 저렇게 많은 계집아이들을 남겨 놓고 죽어 가는데 울지 않게 생겼니?>"




02
"두목, 당신은 여자가 별것인 줄 아는데... 하기야 별것은 별것이지. 여자는 인간이 아니에요! 그런데 뭣하러 감정을 품어? 여자는 불가사의한 거예요. 법률과 종교가 들고 나서 봐야 여자에겐 해당 사항이 없어요. 여자에 대해서는 그런 걸 쓰면 안 됩니다. 두목, 그건 너무 가혹한 짓이에요. 공정하지 못해요. 내가 법을 만든다면 남자와 여자에게 같은 법을 만들어 적용하지는 않겠어요. 남자에겐 십 계명, 백 계명, 천 계명이 필요합니다. 결국 사내는 사내니까... 계명이 아무리 많아도 지킬 능력이 있어요. 그러나 여자에게 필요한 율법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 아니 두목, 이놈의 이야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야 하는 겁니까... 여자는 힘이 없는 피조물이오. 두목, 누사를 위해 마십시다. 그리고 여자를 위해...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 남자들에게 분별력을 조금 더 허락하셨으면!"




03
나는 어느 날 아침에 본, 나무 등걸에 붙어 있던 나비의 번데기를 떠올렸다. 나비는 번데기에다 구멍을 뚫고 나올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렸지만 오래 걸릴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입김으로 데워 주었다. 열심히 데워 준 덕분에 기적은 생명보다 빠른 속도로 내 눈앞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이 열리면서 나비가 천천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날개를 뒤로 접으며 구겨지는 나비를 본 순간의 공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엾은 나비는 그 날개를 펴려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나는 내 입김으로 나비를 도우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펴는 것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때늦은 다음이었다. 내 입김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를 날개가 쭈그러진 채 집을 나서게 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어 갔다. 나는 나비의 가녀린 시체만큼 내 양심을 무겁게 짓누른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바위 위에 앉아 새해 아침을 생각했다. 그 불쌍한 나비라도 내 앞에서 몸을 뒤척이며 내가 갈 길을 일러준다면 참 좋겠다 싶었다.




04
"두목, 문제의 여자가 교회에 왔습디다. 성가대 앞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성상이 환해지지 뭡니까. 예수님, 성모님, 열두 사도님께 맹세코... 갑자기 모든 게 환해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성호를 긋고는, <어떻게 된 거야, 햇빛이 비친 건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둘러봤더니, 아, 과부 때문에 그렇게 되었던 거라니까요."




05
"할배 역시 나와 똑같은 난봉꾼이었지요. 그러나 이 늙은 난봉꾼께서는 성지를 순례하시고 하지(메카나 예루살렘을 순례한 사람)가 되었답니다. 이유야 누가 압니까?
할배가 돌아오시자, 평생 좋은 일 한 토막 해본 적이 있기는 커녕, 알아주는 염소 도둑인 옛 친구 한 분이 그러셨다나. <그래, 이 친구야, 성지를 다녀왔으니 내 몫으로 성스러운 십자가 한 조각이라도 뜯어 왔으렷다?> 할배 왈. <이 사람아, 우리가 어떤 사이라고 빈손으로 오겠나. 오늘 밤 우리 집으로 오되 신부님도 모시고 오게나. 내가 자네에게 이 성스러운 물건을 건넬 때 함께 축복해 주시도록 말일세. 그리고 애저 구이 한 마리랑 포도주도 한 통 가져오게. 그래야 재수가 있다네.> 그날 밤 할배는 집으로 오셔서 벌레 먹은 문설주에서 나무를 조금 떼어 냈어요. 쌀알 하나보다 크지는 않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이걸 보드라운 천 조각에 싸시더니 기름을 한두 방울 떨어뜨리고는 기다렸습니다. 얼마 후 문제의 사나이가 애저 구이와 포도주를 들고 신부님과 함께 왔습니다. 신부님은 스톨라를 꺼내 입으시고 축복했습니다. 할배는 이 귀한 나무 조각의 양도 의식을 턱 하니 치른 뒤에 애저 구이를 뜯기 시작했습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두목. 문제의 사나이는 이 귀한 나무 조각 앞에 엎드려 절을 하고는 끈으로 꿰어 목에다 걸었습니다. 그러고는 그날부터 영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람이 싹 달라진 것입니다. 그는 산으로 들어가 아르마톨과 클레프트 산적 떼에 가담하여 터키 마을을 불태우는 데 일익을 맡았습니다. 뿐입니까? 겁 없이 총탄의 소나기 속을 누볐습니다. 무서워할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성지에서 가져온 거룩한 십자가 쪼가리를 턱 목에다 걸고 있는데 총알인들 그를 다치게 할 수야 있겠습니까?"
조르바는 껄껄 웃었다.
"...만사는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그가 조금 뜸을 들이고는 말을 계속했다.
"...믿음이 있습니까? 그럼 낡은 문설주에서 떼어 낸 나무 조각도 성물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나요? 그럼 거룩한 십자가도 그런 사람에겐 문설주나 다름이 없습니다."





간만에 읽은 좋은 작품.
원서로 읽어보진 못했지만 이윤기 아저씨의 번역이 굉장히 자연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카잔차키스는 이 작품 등으로 그리스 정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아테네 매장도 거부당했지만
그의 작품 구석구석에서는 교리를 초월한 종교적 지혜가 엿보인다.

카잔차키스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있다고.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서른이 되기 전에 읽을 수 있어서 다행.
하루키의 먼북소리에 이어, 언젠가 그리스에 꼭 가보고 싶게 만드는 책.




About this entry




Notice

Calendar

«   2010/09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History